
맨하탄 금싸라기 땅 한복판 멀쩡한 건물에 흙만 가득한 방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 있는가? 이게 무슨 사치라고 할지 모르지만, 과장이 아니라 실제 그런 흙방이 존재한다. 이 방은 이름도 "New York Earth Room (뉴욕 흙방)"이라고 부른다. 이 방은 할렘 같은 곳도 아니라 맨하탄 중에서도 명품샾과 맛집이 가득한 핫 플레이스인 소호(SOHO) 지역에 있다. "방"이라고 하면 "노래방"부터 "PC방", "비디오방", "찜질방"까지 우리나라만큼 각종 방을 사랑하는 나라가 없는데, 방이라면 경쟁도 안될 맨하탄에 우리나라에도 없는 "흙방"이 있는 것이다.
그럼 잠깐 이 흙방의 스펙을 좀 알아보자. 흙방의 바닥 면적만 3600 제곱피트(약 101평)이고, 무게가 127톤이 넘는 흙이 56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고르게 깔려있는 말 그대로 흙만 있는 방이다. 사실 맨하탄, 그것도 소호 지역에서 100평이 넘는 방을 임대 주지 않고, 흙이나 채워놓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미국의 유명한 부동산 사이트인 질로(Zillow)에 소호 지역에 있는 아파트가 월 임대료가 얼마로 나와있는지 보니 침실 2개짜리 방이 월 2만 5천 달러에 나와있는 물건이 있다. 참고로 주소지가 136 Sullivan Street로 나와있는 이 아파트는 흙방(141 Wooster Street)에서 도보로 5분 거리로 꽤 인접해 있으니 충분히 유사물건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아파트의 넓이는 1,300 제곱피트이니 흙방의 3,600 제곱피트에는 반도 미치지 못한다. 대충 이 흙방을 아파트로 개조하면 월 5만 달러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계산이 대충 나온다.

역시 맨하탄 한복판 사람 살기도 빠듯한 건물에 흙을 보관하는 방이 가능한 것은 경제적 논리로는 당연히 설명이 안되고, 예술이라는 명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뉴욕은 예술로 인정받으면 바나나도 6백만 달러에 팔 수 있는 곳이다.
이 흙방은 1977년 작품인데 사실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니라, 총 3개의 흙방이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이 뉴욕의 흙방이 제일 막내이면서 현재 유일한 흙방이다. 첫 작품은 1968년 독일 뮌헨에 만들어졌고, 두 번째 작품도 서독 Darmstadt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둘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의 흙방은 독일계 미술 딜러였던 하이너 프리드리히(Heiner Friedrich)가 자신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주최하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3개월만 전시 후 철수할 예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1980년에 디아 아트 재단(Dia Art Foundation)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그 재단은 뉴욕의 흙방을 영구히 지키기로 약속했다. 이 디아 예술 재단은 방탄소년단의 RM이 다녀가서 더 유명해진 디아 비콘(Dia Beacon)을 운영하는 바로 그 같은 재단이다. 디아 예술 재단은 뉴욕주에 허드슨 밸리에 있는 디아 비콘(Dia Beacon), 맨하탄에 위치한 디아 챌시(Dia Chelsea), 롱아일랜드의 디아 브리지햄튼(Dia Bridgehampton) 등 3개의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디아는 주로 규모가 커서 일반적인 뮤지엄에서 전시되기 어려운 대형 프로젝트 설치 미술 등을 통해 예술가들의 커다란 비전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미션으로 하고 있다.

뉴욕 흙방은 디아(Dia)의 의뢰로 뉴욕시에 살면서 활동하던 미국의 미술가이자, 뮤지션이기도 했던 월터 디 마리아(Walter De Maria, 1935 – 2013)가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관리하는 사람은 빌 딜워스(Bill Dilworth) 씨다. Wooster 가 141번지에 있는 이 흙방 건물은 거리에서 보면 전혀 이런 것이 있으리라고 눈치채기 힘들 만큼 평범한 건물이다. 엄청난 작품이 전시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간판 따위는 없다. 숨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는 사람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현관문도 잠겨 있기 때문에 벨을 눌러야 열어준다. 그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가 딜워스 씨다. 이 흙방은 2층에 위치해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우선 마주치게 되는 사람이 저만큼 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딜워스 씨고, 오른편 코너를 돌자마자 바로 흙이 가득한 공간이 있다.
흙방을 마주하기도 전에 벌써 쾌쾌한 냄새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 여름 굵은 장대 소나기가 내린 뒤에 젖은 흑냄새라고나 할까? 그리고, 시간이 멎은 듯한 그 고요함과 적막함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초월적인 느낌이다. 계단 하나만 내려가서 문을 열면 맨하탄의 분주한 거리와 소음이 가득한 곳이 바로 지척에 있는데 말이다.
벨 울리면 문 열어주는 단순한 일이지만, 이 자리는 파트타이머의 자리가 아니다. 딜 워스 씨는 1989년 흙방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재빨리 낚아챘다고 한다. 이제 이 자리는 딜 워스 씨의 영구직이라고 할 수 있다. 죽어야 끝날 일이라고 해야 하나? 원래 흙방에는 전기 조명을 켜두었는데, 딜 워스 씨는 조명을 켜지 않는다고 한다. 조명을 끄면 사람들이 좀 더 오래 머물면서 작품을 감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손님이 너무 많으면 가끔 불을 켜서 회전율을 높이기도 한다고 한다.
딜 워스 씨가 하는 일은 문을 열어주는 것만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흙에 물도 주고, 갈퀴로 고르게 골라준다고 한다. 놈부처럼 흙을 정성스럽게 관리하지만 흙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역설이다. 실제 흙에서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흙 속에서 잠자리가 부화한 적도 있고, 풀이나 버섯이 자라는 경우도 있었는데, 딜 워스 씨는 이런 것들이 작품의 일부가 되지 않도록 이런 불순물(?)들을 성실하게 감시하고 걸러내고 있다. 심지어 관람객 중에서 콩을 흙에 던진 경우도 있다는데 이런 것들도 당연히 가차 없이 걸러내는 것이 딜 워스 씨의 몫이다. 딜 워스 씨의 아내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또 다른 디 마리아(De Maria)의 작품인 "Broken Kilometer"를 관리하고 있다. 이 작품도 디아(Dia)의 관리 하에 있는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일자리를 두 부부가 다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뉴욕 흙방(New York Earth Room)은 작가의 뜻에 따라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매주 수요일부터 일요일 12시부터 6시까지 문을 열며, 3시부터 3시 30분까지 30분간은 문을 닫기 때문에 방문 시에는 이 시간만 피하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보: 예약 따위는 필요없고, 관람은 공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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