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팔아 직접 찾아간 미국의 인물, 건물, 그리고 사물 이야기

14. 공연을 독점한 피아노: Steinway (스타인웨이)

ktiffany 2025. 1. 20. 03:01

 한국에서 2019년 개봉한 영화 "그린북(Green Book)"은 실제 했던 흑인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Don Shirley (돈 셜리) (1927 ~ 2013) (마허샬라 알리 분)와 그의 보디가드 토니 발렐롱가(비고 모텐슨 분) 간 공연 투어 중 발생하는 해프닝과 우정을 그린 로드 무비이자 버디 무비이다.
돈 셜리는 재능있고 존경받는 흑인 피아니스트였지만, 1960년대는 여전히 흑인 차별이 심한 시대로 미국 남부 공연 투어 중 차별로 인한 여러 고충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뉴욕 브롱스(Bronx) 출신의 이탈리아계 백인이었던 토니 발렐롱가가 돈 셜리의 공연 투어 운전기사이자 보디가드로 돈 셜리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 영화에서 필자가 굉장히 인상 깊게 본 장면이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관한 것이다. 돈 셜리는 공연 조건으로 주최측에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준비하도록 계약서로 요구하는데 토니가 인디애나주 하노버의 공연홀에서 공연 두세 시간 전 무대를 점검하러 왔다가 쓰레기가 가득한 관리가 엉망인 피아노, 그것도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닌 것을 보고, 공연 관리 매니저에게 당장 깨끗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구해다 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공연 관리자는 아무 피아노나 있는 걸로 그냥 치라면서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캠퍼스에 한 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디애나 주 전체를 뒤져도 두대나 있을지 모른다고 대꾸한다. 그러자, 토니는 다짜고짜 공연 관리자의 귓방망이를 시원하게 날리는데, 영화의 다음 장면은 돈 셜리가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서 우아하게 신나는 재즈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홍보하기 위한 영화가 아닌데, 굳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영화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실제로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상징성과 독점성이 영화에서 과장된 것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타인웨이도 이를 숨기지 않는다. 맨하탄 미드타운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피아노 매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걸려있다.

 
"97% of Piano Soloists Choose the Steinway Piano."
(97%의 피아노 독주 연주자들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선택합니다.)

 

<필자 사진> 맨하탄 미드타운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피아노 매장: 97% of Piano Soloists Choose the Steinway Piano.

 
뉴욕의 대표적 공연장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 MSG) 앞에는 빌리 조엘(Billy Joel)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00회 공연을 함께한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피아도도 다름아닌 스타인웨이 피아노이다. 

<필자 사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전시된 빌리 조엘의 100회 공연 스타인웨이 피아노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는 1853년 독일계 이민자였던 Henry E. Steinway가 최고의 피아노를 만들겠다는 비전으로 뉴욕시에 설립한 피아노 제조 기업이다. 스타인웨이의 원래 독일 이름은 Heinrich Engelhard Steinweg인데 그는 1850년 미국으로 이민 후 3년 뒤 이름을 영어식으로 바꾸고, 자신의 영어 이름을 건 피아노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필자 사진> 뉴욕 맨하탄 미드타운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매장

 
스타인웨이는 피아노 관련 139개의 특허를 갖고 있을 만큼 피아노 제조 기술에서 엄청난 발전을 보여준 회사이기도 하다. 현재 표준으로 받아들여지는 피아노의 3개 페달도 스타인웨이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스타인웨이가 완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래 피아노는 댐퍼(damper) 페달과 soft(소프트) 페달 두 개로 구성되었는데, 프랑스의 피아노업자들이 소스테누토(sostenuto)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하지만, 피아노제조업자들 사이에서 잘 보급이 되지 않았는데, 1874년 스타인웨이에서 소트테누토(sostenuto) 페달을 완성해 특허를 내고, 자사 피아노에 이 3개 페달을 적용한 것을 계기로 다른 제조사에서도 3개 페달이 널리 보급되게 된다.

<필자 사진> Park Avenue Armory에 소장된 오래된 피아노: 페달이 2개인게 눈에 띈다.

 
하지만, 독점적인 콘서트 피아노 시장 장악에는 마케팅과 브랜드 이미지 관리에도 독보적인 노하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866년 뉴욕시에 카네기홀이 생기기 훨씬 이전 맨하탄의 14번가에 스타인웨이 홀(Steinway Hall)을 건립한 것이다. 이 홀은 뉴욕시에서 두 번째로 큰 콘서트홀이면서 스타인웨이 피아노 쇼룸이기도 했다. 콘서트를 보러 온 관객들은 반드시 이 쇼룸을 거치도록 동선이 설계된 덕분에 자연스럽게 마케팅을 할 수 있었고 당연히 피아노 매출도 급증했다고 한다. 스타인웨이 홀은 1891년 카네기홀이 문을 열 때까지 25년간 뉴욕 필하모닉(New York Philharmonic)이 상주하는 등 뉴욕시의 문화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위키피디아> 맨하탄 14번가에 위치한 옛 스타인웨이홀 전경

이후 카네기홀이 문을 열면서 스타인웨이홀은 1925년 57번가로 자리를 옮긴다. 새 건물은 멋진 원형 돔 천장(rotunda)을 자랑하는 세련된 홀이었는데, 현재는 뉴욕시의 랜드마크 건물로 공식 지정되었다. 

<위키피디아> 맨하탄 57번가의 스타인웨이홀 원형돔 홀(Rotunda)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는 극강의 난이도로 평가받고, 2022년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으로 이끈 곡이기도 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ff)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유독 좋아했다. 뉴욕에 거주하던 라흐마니노프는 바이올린의 거장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로부터 한 젊은 러시아 청년이 라흐마니노프의 3번 피아노 협주곡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스타일로 기막히게 연주하니 꼭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 둘은 만나자마자 음악적 동지가 된다.
 
호로비츠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려 한다면, 당연히 그 곡의 작곡가가 조언을 해주는 것이 마땅했고, 그 둘이 향한 곳이 57번가의 스타인웨이 홀이었다. 이 스타인웨이홀 지하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오케스트라 파트를 연주했고, 호로비츠는 또 다른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솔로 파트를 연주했다. 작곡과 연주의 거장 중에 거장들이 동시에 이 스타인웨이 홀에서 만난 것이다. 그 이후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호로비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스타인웨이는 스타인웨이홀 같은 콘서트홀 뿐만 아니라 스타인웨이 아티스트 프로그램(Steinway Artist Program)도 운영했다. 1872년 스타인웨이는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스타인(Anton Rubinstein)의 유일한 미국 콘서트 투어를 하는데 협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스타인웨이 아티스트 프로그램 (Steinway Artist Program) 이 태동하게 된다. 스타인웨이 아티스트 타이틀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에게만 부여된다. 이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로만 공연해야 하는데, 이런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아티스트들이 별도의 돈이나 지원을 받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린 아티스트들은 사실 조금이라도 유명한 사람이라면 거의 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피아노 연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름을 몇 명만 대자고 해도 유자 왕(Yuja Wang), 랑랑(Lang Lang), 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 마사 아르게리치(Martha Argerich), 엠마누엘 액스(Emanuel Ax), 빌리 조엘(Billy Joel), 콘래드 타오(Conrad Tao), 예프게니 키신(Evgeny Kissin) 등이 모두 이 프로그램에 올라 있고, 지금은 지휘자로 더 알려진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나 정명훈도 스타인웨이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소속되어 있다. 
 
아쉽게도 스타인웨이는 2013년 뉴욕 부동산 시장의 활황과 경영의 불황을 고려하여 뉴욕시 랜드마크로 지정된 57번가의 스타인웨이홀을 매각하고, 지금의 미드타운 쇼룸으로 이전한다.  57번가에 스타인웨이가 떠난 자리에는 초고층 주거 빌딩인 스타인웨이 타워(Steinway Tower)가 자리를 차지했다.

<필자 사진> 센트럴파크에서 바라본 스타인웨이 타워(Steinway T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