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면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포함해 모네, 마네, 드가, 렘브란트 같은 유명 유럽 화가들의 작품에 먼저 눈이 가겠지만, 그래도 미국에 있는 미술관에 갔다면 꼭 미국관(American Wing)을 꼭 가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메트 미술관이야 그냥 미국의 미술관정도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유럽의 유명 화가들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 미술관이다 보니 역시 미국 작품들은 당연히 메트 뮤지엄이 최고일 수밖에 없다.
메트 뮤지엄에서도 이런 미국 작품들 중 단연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독일계 미국인 화가 엠마뉴엘 로이츠(Emanuel Leutze)가 그린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조지 워싱턴)"일 것이다. 이 작품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워낙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그림 자체가 정말 대단한 스케일인 것도 한몫한다. 메트 뮤지엄의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는 그림의 크기가 폭이 거의 6.5미터, 높이가 3.8미터에 가까운 엄청난 크기로 아마 메트 뮤지엄에서도 그림으로서는 가장 큰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조지 워싱턴이 뉴저지 트렌턴(Trenton)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군대를 기습공격하기 위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이 작전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면 매 전투마다 패배하며 사기가 저하된 미국 독립군의 전세를 역전시키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작전은 177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밤에 개시되었는데, 사실 그림으로만 봐도 강에 얼음이 가득할 정도로 추운 날씨에 조지 워싱턴의 군대에도 리스크가 있는 작전이었다. 실제로 3개 팀이 따로 강을 건너기로 했지만,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것은 조지 워싱턴이 지휘한 부대뿐이었다. 정말 추운 날씨에 그것도 크리스마스 밤이니 영국군이 긴장이 풀려있을 것은 당연했다. 조지 워싱턴은 실제로 이 작전의 성공으로 독립군의 사기를 높이고,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이 전투가 미국 역사적으로 얼마나 의미 있는 전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눈썰미 있는 사람에게나 겨우 보일 만하지만,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흑인이 한 명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지 워싱턴의 무릎 쪽에 빨간 소매 옷을 입고, 노를 젓고 있는 인물이다.

공식적으로 흑인은 군인 자격으로 참전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흑인들이 독립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역사적 사건 이후 75년 뒤에야 화가가 이 그림을 상상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흑인을 특정 인물로 추정하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사실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화가가 현장을 직접 보지 않고, 75년 뒤에나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높이 부여하기는 힘들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화가가 조지 워싱턴의 이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작전에서 흑인들이 참여하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화가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상상으로 흑인을 그려냈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전설 같은 이야기를 더해 그림 속의 인물을 실존 인물이라고 하면 역사적 사건을 더 생생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더욱 흥미를 돋운다.
얘기한 김에 이 흑인으로 지목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은 프린스 위플(Prince Whipple)이다. 그는 어렸을 적 노예로 미국에 끌려와 뉴햄프셔에서 자랐고, 미국 독립혁명 중 대령이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인기도 한 William Whipple의 보좌관이자 보디가드로서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이다. 제임스 브라운은 담배 무역으로 돈을 잘 번 덕에 맨하탄의 Varick Street와 Charlton Street이 만나는 곳에 있던 조지 워싱턴의 Richmond Hill 대저택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멋진 타운 하우스(326 Spring Street)를 소유할 수 있었다. 이 집은 1770년 경에 지어졌다. 제임스 브라운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의 흑인 보좌관이었다고 한다. 그가 조지 워싱턴과도 가까운 집에서 살았다는 것과 워싱턴의 보좌관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림 속의 조지 워싱턴 바로 옆에 있는 흑인이 제임스 브라운이라는 주장은 일견 설득력 있기도 하다.
제임스 브라운이 죽고 나서, 이 주택은 드디어 현재 이 건물의 역할의 모태가 되는 길을 걷게 된다. 1890년 아이리쉬계 이민자인 토마스 클로크(Thomas Cloake)가 이 건물을 사서 선원들에게 집에서 양조한 맥주와 옥수수로 만든 위스키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금주령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토마스 클록크는 건물을 팔아버렸으나, 이후 금주령 기간에도 건물 2층은 숙박시설로, 밀매상 아지트로, 매춘 시설로, 병원으로 업종도 다양하게 바뀌었지만, 건물 1층만큼은 밀주 판매점(speakeasy)으로 술집의 명맥을 중단 없이 유지했다.
금주령이 끝나고, 그 술집은 다시 대중들을 상대로 문을 열었는데, 술집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았다. 이미 그곳은 이름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뱃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즐기는 여성 금지 클럽하우스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그 이름 없는 바를 "The Green Door"라고 불렀는데, "Green Door"는 속어로 비밀스럽고, 금지된 곳을 뜻하기 때문에 그 술집의 비밀스럽고 합법과 불법을 오가는 영업관행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1969년 11월 19일 랜드마크 보존 위원회(Landmarks Preservation Commission)가 이 제임스 브라운 건물을 뉴욕시 랜드마크로 지정하게 된다. 일단 랜드마크로 지정된 건물은 아무리 소유주라도 건물을 허무는 것은 물론 개조, 변경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랜드마크의 기본 취지가 일단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에 못 하나 박으려고 해도 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1970년대 후반 현재 주인인 Martin Sheridan과 Richard Hayman이 이 건물을 인수하게 된다. 이들은 새로운 영업장의 간판 이름 하나조차도 랜드마크 위원회의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기존에 문 밖에 걸려있던 "BAR"라고 쓰인 간판의 철자 "B"에서 "3"자 모양 부문을 덮어버려서 알파벳 "B"를 "E"로 바꿔버린다. 그렇게 해서 이 새로운 바의 이름은 "EAR INN"이 되었다.




지금의 소호에 있는 이 바& 레스토랑은 역사적인 건물로서, 재기발랄한 이름이 탄생한 배경에서, 음식 맛까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곳이다. 뉴욕, 특히 소호에 갈일이 있다면 꼭 방문해 볼만한 곳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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