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팔아 직접 찾아간 미국의 인물, 건물, 그리고 사물 이야기

20. 치명적 결투 장소가 최고의 뉴욕 스카이라인 뷰 포인트가 되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ktiffany 2025. 2. 3. 01:40

짧은 일정으로 뉴욕 여행을 해야 할 때 사람들이 짜장 먹을까, 짬뽕 먹을까 하는 고민처럼 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뉴욕 맨하탄의 전망대 중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갈 것이냐, 아니면 록펠러 센터 전망대인 탑 오프 더 락(Top of the Rock)을 갈 것이냐이다. 그럴 때 정답처럼 제시되는 논리 중 하나가 록펠러 센터 전망대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얘기이다. 뉴욕의 야경 중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빠진다면 뉴욕의 야경이 완성되지 않는 듯한 찝찝한 느낌이 있다.

<필자 사진> 브라이언 파크에서 바라 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 완공되었는데, 전체 공사기간이 13개월에 불과하다. 사실상 뉴욕을 대표하는 빌딩이 1년 만에 뚝딱 만들어진 셈이다. 그런데, 준공 당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서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언론과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실상 한동안 실속은 챙기지 못한 빌딩이었다. 뉴욕 미드타운의 오피스 수요가 충분하지 못해 빌딩 공실율이 엄청나게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실로 인한 손실을 그래도 보전할 수 있게 해 준 수익 사업이 1931년 오픈한 전망대였다. 전망대 사업이 이렇게 돈이 되는 사업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해보니 정말 돈이 되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결국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고층 빌딩 전망대 사업의 유망성을 입증한 뉴욕 최초의 빌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이후로 뉴욕은 전망대 춘추전국 시대라고 할 만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록펠러 센터 탑 오브 더 락 전망대의 양강 체재에서 이제는 9.11 테러로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이후 지어진 One World Trade Center 전망대부터, 2020년 3월에 허드슨 야드(Hudson Yard)에 문을 연 에지(Edge) 전망대와 같은 해 10월에 오픈한 밴더빌트(Vanderbilt) 빌딩 전망대까지 벌써 5개이다. 2020년에는 한꺼번에 2개의 전망대가 문을 연 셈이다. 이제는 하루에 하나씩 뉴욕 전망대만 다 찍고 가려해도 5일이 걸리는 뉴욕 전망대 시대가 도래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이전에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크라이슬러 빌딩이었다. 그렇지만, 이 비운의 빌딩에는 전망대가 없었다. 그런데 크라이슬러 빌딩이 비운이 빌딩인 이유는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야심을 갖고 지어졌지만, 이 명성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인해 그 타이틀을 1년도 안되서 반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 빌딩이 1930년에 준공되었는데 엠파이어 빌딩이 1931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는 뉴욕의 하늘을 뺏고 마치 신과 닿겠다는 발칙한 야심을 가진 빌딩들의 경쟁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필자 사진>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바라 본 크라이슬러 빌딩

 
크라이슬러 빌딩 이전에 가장 높은 빌딩은 1913년에 지어진 울워스 빌딩(Woolworth Building)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70년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 빌딩(일명 쌍둥이 빌딩)이 지어질 때까지 거의 40년 가까이 가장 높은 빌딩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래서 크라이슬러 빌딩 입장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더욱 야속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뉴욕 맨하탄의 전망대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정작 이 5개 전망대를 다 들른다고 해도 볼 수 없는 전망이 있다. 바로 맨하탄 스카이라인을 파노라마 뷰로 시원하게 볼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마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맨하탄의 중심에서는 맨하탄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정말 제대로 된 맨하탄 스카이라인의 파노라마 뷰를 볼 수 있는 곳은 허드슨 강을 건너 뉴저지의 위호켄(Weehawken)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있는 해밀턴 파크에서는 정말 시야에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맨하탄의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다. 

<필자 사진> 뉴저지 위호켄에 위치한 해밀턴 공원(Hamilton Park) 입구: 허드슨 강 건너 맨하탄의 스카이라인이 선명하다.

 
해밀턴 공원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공원 이름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지금의 컬럼비아 대학교의 전신인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서 공부한 영민한 인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정부에서 1789년에서 1795년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근대적인 중앙은행 시스템의 전신인 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를 창안하고 법안을 통과시킨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그는 토마스 제퍼슨 같은 쟁쟁한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나라의 신용을 안정화시키고 정부의 재무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은행의 설립을 당차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알렉산더 해밀턴은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알고 있는 중앙은행 시스템의 기초를 닦은 선구자였다. 이렇게 미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47세의 젊은 나이로 비극적으로 사망하게 된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맨하탄의 가장 멋진 경치를 제공하는 곳인 해밀턴 공원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해밀턴 공원에서 죽은 것은 아니다.
 
Aaron Burr는 지방과 연방 정부의 유력한 인사로 많은 정적이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알렉산더 해밀턴은 더욱더 그랬다.  그런 중에 Dr. Charles Cooper가 해밀턴의 장인인 Philip Schuyler에게 보낸 1804년 4월 24자로 Albany Register 신문에 실린 것이 해밀턴의 생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 저녁 만찬 파티에서 해밀턴과 Kent 판사의 대화를 엿들은 Dr. Charles Cooper가  Philip Schuyler에게 그 내용을 전하는 편지를 쓴 것이었다. 그 편지의 요지는 해밀턴이 Aaron Burr를 정부의 요직을 맡길 수 없는 위험한 인물로 보고 있으며, 1804년 뉴욕주지사 자리에 출마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Aaron Burr가 뉴욕주지사 선거에서 지고 얼마 안 되어 해밀턴이 자신에 대해 언급한 그 기사에 대해서 알고 대노하면서, 자신의 인격에 대한 해밀턴의 집요한 모욕으로 주지사직을 낙선하고 정치 인생도 끝나게 되었다고 여기게 되었다. 결국 Aaron Burr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해밀턴은 이를 받아들였다.
 
1800년대 초부터 결투(Duel)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뉴욕주와 뉴저지주 모두 결투는 그 당시 이미 불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리더십을 중요하게 여겼던 관료들이나 군인 출신 등은 결투에서 물러서는 것이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고 여겼다. 군인 출신이자 관료였던 해밀턴도 이런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아론 버(Aaron Burr)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이고, 1804년 7월 11일에 뉴저지의 위호켄(Weehawken)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들이 뉴저지주를 택한 이유는 뉴욕과 뉴저지 모두 결투가 불법이기는 했지만, 뉴저지는 뉴욕보다 법적용을 엄격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결투일 전날인 7월 10일 아내인 Eliza Schuyler Hamilton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감한 편지였다. 
 

"... But you had rather I should die innocent than live guilty. Heaven can preserve me and I humbly hope will but in the contrary event, I charge you to remember that you are a Christian. God’s Will be done. The will of a merciful God must be good..." 
(하지만, 당신도 죄책감을 갖고 사느니 순결하게 죽는 것을 바라겠지요. 하늘이 나를 지켜줄 수 있고, 나도 간절히 그러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 반대의 경우에는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라오. 하느님의 뜻대로 될 것이요.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은 좋은 것이겠죠.)

 
1804년 7월 11일 아침 6시 30분경 존 버가 먼저 결투 장소에 도착하고, 곧 7시쯤 해밀턴도 결투 장소에 나왔다. 결투는 둘이서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주선자와 룰까지 세심하게 논의하여 정하는 공식적인 의식이었다. 결국 그 둘은 결투 장소에서 화해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었고, 쓰러진 사람은 해밀턴이었다. 총알이 갈비뼈와 간, 횡격막까지 관통했고, 엄청난 통증을 겪었다. 곧 배로 허드슨 강을 건너 뉴욕시로 그를 이동시켜 친구인 William Bayard의 집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다음날 오후 아내 엘라이자(Eliza)와 가족,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묘지는 Lower Manhattan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 묘지(Trinity Church Cemetry)에 안장되어 있고, 아내 엘라이자(Eliza)도 같은 곳에 묻혔다. 

<필자 사진> 월스트리트 트리니티 교회 묘지(Trinity Church Cemetry)에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 묘비

 

<필자 사진> 해밀턴의 죽음으로 미망인이된 Eliza의 묘도 해밀턴의 묘비 바로 앞에 같이 하고 있다.


해밀턴의 죽음으로 아론 버를 향한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기소될 것을 우려한 아론 버는 7월 22일 뉴욕시에서 도망쳐 친구 집에 하루 머물고 필라델피아로 피신했다. 결국 존 버는 기소를 피할 수 있었고, 같은 해에 워싱턴 D.C.로 돌아와 자신의 부통령 잔여 임기까지 모두 마쳤다. 아론 버는 그 결투 이후 32년을 더 살았으며, 1836년 9월 14일 사망해 뉴저지 프린스턴에 안장되었다. 
 
1806년에 결투장소를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최초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1821년에 도굴군들이 이를 분해해 훔쳐가 버렸다. 그리고, 1856년에는 결투 위치에 길이 뚫리는 바람에 사실상 결투의 정확한 위치도 사라져 버렸다. 1870년에는 철로를 건설하기 위한 개발로 인해 위호켄의 해안선까지 바뀌면서 결투 현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894년 지금의 기념비 설치 위치에 해밀턴의 흉상이 세워졌으나 1934년 그것도 도적들의 파손으로 망가졌다. 
 
현재 서있는 해밀턴의 브론즈 흉상은 1935년 존 라페티(John Rapetti)의 조각 작품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자유의 여신상의 조각에도 참여했던 조각가로 1899년 미국으로 건너와 위호켄에 정착한 예술가였다.  

<필자 사진> 위호켄 Dueling Grounds에 있는 해밀턴 흉상

 
해밀턴 흉상 받침대 뒤에는 큰 바위가 하나 놓여있는데, 민담에 따르면 그 바위는 해밀턴이 총을 맞고 기대 쉬던 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근거는 없는 얘기다. 하지만, 후에 위호켄 개발로 인해 정확한 결투 장소가 사라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바위가 결투 현장에 존재하던 돌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역사적 의미는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사잔> 해밀턴 흉상 뒤에 있는 바위: 해밀턴이 결투에서 총을 맞고 이 돌에 기대 쉬었다는 민담이 있다.


해밀턴의 이야기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가수이자 작곡가, 연기자로 다재다능하고, 2016년 개봉해 히트 친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Moana)에서 "How Far I'll Go" 나 "You're Welcome." 같이 유명한 곡을 쓰기도 한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가 Ron Chernow의 전기 "Alexander Hamilton"에 영감을 받아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7년간 창작했는데 정통 뮤지컬과 다르게 랩, 힙합 등을 활용해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Ron Chernow가 쓴 뮤지컬 해밀턴의 원작 전기문

처음에는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 뮤지컬로 2015년 2월 17일 Lower Manhattan에 있는 퍼블릭 씨어터(Public Theater)에서 막을 열었는데 이미 브로드웨이 진출 전부터 7개월치 전공연 표가  동이 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린마뉴엘 미란다가 개시 공연부터 직접 주인공 해밀턴의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다.

<필자 사진> 맨하탄 United Palace에서 진행된 영화 시사회에서 진행을 맡은 Lin-Manuel Miranda (린마누엘 미란다)(맨 좌측)가 출연진과 대화 중이다.

 
이런 인기를 기반으로 같은 해 8월 6일 브로드웨이의 Richard Rodgers Theater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뮤지컬 해밀턴은 2016년 70회 토니상(Tony Awards) 시상식에서 기록적인 16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최종적으로 최고의 뮤지컬(Best Musical) 부문을 포함해 11개를 수상했다. 코로나 기간이었던 2020년에는 디즈니플러스(Disney+)에서 공연 녹화분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 중이다.

<필자 사진>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이 공연 중인 리차드 로저스 극장(Richard Rodgers Theater)

 
미국 지폐에 초상화가 새겨진 인물 중 역대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이 두 사람뿐인데, 이런 이유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로터리(Lottery)가 보통 30불, 40불 이상으로 계속 가격이 오르는 가운데에서도 뮤지컬 해밀턴의 로터리는 1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해밀턴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착한 가격으로 10달러다. 한 가지 함정은 정말 당첨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해밀턴이 100달러 지폐가 아니라 10달러 지폐에 등장한 덕에 운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부담 없는 가격에 최고 인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10 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알렉산더 해밀턴 초상화

 
참고로 뉴저지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Hamilton Park)과 해밀턴의 동상이 서있는 Dueling Grounds는 서로 다른 곳이다. 그러니 해밀턴 공원에 가서 해밀턴의 동상을 찾으면 안 되고, 해밀턴 공원에서 맨하탄을 바라보는 쪽 기준으로 바로 우측에 조그마하게 역사적 결투를 기억하기 위한 Dueling Grounds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방문하면 좋다. 

<필자 사진> 위호켄 해밀턴 공원에서 바라본 맨하탄 미드타운의 스카이라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선명하게 보인다. 가운데 삼각형 모양의 꼭대기의 가장 높은 건물이 최근에 지어진 Edge 빌딩이며, Edge 전망대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