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팔아 직접 찾아간 미국의 인물, 건물, 그리고 사물 이야기

21. 오! 미국 시민권이여!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ktiffany 2025. 2. 10. 12:06

지난 2015년 10월에는 대만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던 차이나 항공 보잉 777 (Boeing 777) 비행기가 이륙한 지 약 6시간 만에 한 대만 여성이 기내에서 산통을 겪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내에 로스앤젤레스 의사가 탑승했던 덕분에  이 대만 여성은 태평양 상공에서 아기를 무사히 분만할 수 있었다. 이 여성 때문에 원래 로스앤젤레스로 가야 하는 비행기가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선회했지만, 결국 아기는 비행기 안에서 태어났다. 

 

"Are we in U.S. air space?"

 

이 대만 여성은 비행기에서 분만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승무원에게 비행기가 미국 영공에 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아이의 국적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이 아이는 만삭으로 항공사 및 공항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첩보간첩처럼 비행기에 탑승해 낸 엄마의 절실한 노력 덕분에 하늘도 도우셨는지 결국 미국 시민권 자격이 있다고 한다. 미국 영토 반경 12마일 이내에서 태어난다면 미국 시민으로 인정이 된다는 룰 덕분이다. 그러나,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와 분리된 채 미국 입국을 거부당하고, 다음 비행기로 자국으로 돌아가도록 강제추방당했다. 

 

트럼트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백악관에 입성한 첫날 가장 먼저 서명한 행정명령(executive order) 문서 중 하나가 미국 영토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지도 않고, 미국 국적을 부여하는 미국의 혜자스러운 제도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이 행정명령의 골자는 적법한 이민 서류를 갖추지 못한 불법이민자들과 임시적 신분 지위로 미국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미국에서 낳은 자녀에 대한 미국시민권 부여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는 크게 출생아에게 두 가치 원칙 중 하나에 따라 국적을 부여한다. 하나는 혈연주의(jus sanguinis)이고, 또 하나는 속지주의( jus soli)이다. 혈연주의는 대표적으로 우리나라가 따르고 있는 방식으로 부모의 국적에 따라 자녀의 국적을 부여하는 것이고, 속지주의는 미국처럼 그 나라에서 태어나면 시민권을 갖게 되는 방식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두 원칙을 칼로 자르듯이 딱 잘라 국적을 부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속지주의를 채택한 경우에도 혈연주의가 일부 인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 국적의 부모가 외국에서 아이를 낳은 경우 아이에게 미국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국적에 따른 자녀의 미국 국적을 인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출생에 따른 미국 시민권 취득은 미국 수정헌법 4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로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당연히 위헌 소지가 높다. 아마 이 행정명령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워낙 이해관계자들이 많은 큰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위헌 소송이 곧 제기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따르면 미국으로 원정출산을 하러 가는 외국 여성의 아이를 위한 아메리칸드림은 아쉽게도 통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인 것은 광활한 영토와 석유를 비롯한 무한한 자원, 기축통화인 달러 보유국 등 수많은 하드웨어적인 요소들도 있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미국이 이민자의 국가라는 점이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된다. 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 불법이든 합법이든 미국으로 몰려든 이민자들과 그들의 2세들이 과학과 문화, 비즈니스, 하다못해 음식까지 얼마나 미국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하는가?

 

전기차 테슬라를 만들고, 위성인터넷 서비스(Starlink)를 제공하고, 우주선을 띄우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이민자 출신인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아닌가? 지금은 친환경 전기차를 만들고, 이민자 출신으로 아메리칸드림을 보여준 일론 머스크가 이민자들을 압박하고, 파리 기후 협약을 두 번이나 탈퇴해 친환경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표면적으로는 서로 맞지 않는 두 사람이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같이 일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크지도 않은 땅에 코리아타운, 차이나타운, 할렘(Harlem), 리틀 이태리(Little Italy), 리틀 인디아(Littel India), 타이 타운(Thai Town), 유대인 커뮤니티까지 있는 맨하탄은 다양한 민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그룹을 통해 이들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음식과 문화 언어 덕분에 뉴욕을 더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 주는 것만 보더라도 다른 민족 국가에서 이루기 힘든 다양성이 이민국가에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힘이 이런 곳에서 나온다는 확신이 더욱 들게 한다.  

 

예술계어서 보더라도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요마 같은 거장 첼리스트와 공연을 하고, 뉴욕필 같은 유명 오케스트라와도 무대에 서는 피아니트 엠마누엘 액스(Emanuel Ax)는 폴란드계 미국인이다. 또한,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명한 글래스 피라미드를 디자인한 사람은 중국계 미국인인 아이엠 페이(I.M. Pei)이다. 또한, 월스트리트에 돌진하는 황소(Charging Bull)를 만든 사람은 이태리 출신의 이민자인 아트투로 디 모니카(Arturo Di Modica)이다. 

<필자 사진> 2023년 3월 19일 뉴저지 NJPAC에서 같이 공한 엠마누엘 액스(Emanuel Ax)와 요요 마(Yo-yo Ma)

 

그럼 이제 반대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미술가들도 한번 살펴보자. 지금 살펴볼 세 사람은 평생 미국보다 유럽에서 산 기간이 더 긴 사람들이다. 

 

미국의 도금시대(길드 시대, Gilded Age) 예술가들은 유럽, 그중에서도 파리로 많이 갔다. 도금 시대 파리는 예술계의 중심지였다.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 같은 파리의 아카데미에서는 내로라하는 스승들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교육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리는 예술가들과 작가,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는 문화적 중심지로서 각종 살롱과 갤러리, 전시회 등을 통해 다양한 커뮤니티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게다가, 19세기 후반 들어 특히 프랑스를 필두로 인상주의가 부상하면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같은 화가들의 활약으로 그림을 창작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대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필자 사진>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Woman with a Parasol - Madame Monet and Her Son" (Claude Monet, 1875)

 

이렇게 예술면에서 도금시대 미국보다 훨씬 앞서 가던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유럽, 특히 파리는 미국 출신 미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특히 뒤에 언급할 세 사람은 평생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삶을 산 사람들이다.

 

<필자 사진>  보스턴 미술관(MFA Boston) 소장 Fishing for Oysters at Cancale (존 싱어 사전트, 1878), 캔버스에 유화: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필자 사진>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Nonchaloir (Repose)" (John Singer Sargent, 1911)

 

첫 번째 인물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이다. 사전트는 1856년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적에도 부모를 따라 유럽 지역을 오갔다. 이후 1874년에 프랑스 파리로 가서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공부했다. 이후 1884년에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여성이었던 Virginie Amélie Avegno Gautreau의 초상화를 그려 보자르 아카데미의 공식 전시전인 파리 살롱전에 내놓았다가 어깨끈이 흘러내리는 단정치 못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에 혹평을 받고, 파리에서 인정받기 어렵다고 느껴 1886년에 런던으로 떠난다. 결국 그는 1925년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고, 도합 69년이 넘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유럽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Is Mr. Sargent in very fact an American Painter?"

                                                        - Henry James -

 

이렇다 보니, 당시 유명한 소설가였던 헨리 제임스(Henry James)도 사전트가 미국 미술가인지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사전트 본인은 한 번도 미국인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사전트가 미국에서 건너와 유럽에 온 또 다른 미술가인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 Whistler)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I keep my twang. If you should ever hear anything to the contrary, please state... that I am an American."

("나는 미국 억양도 그대로 야. 어디 가서 다른 얘기 들으면, 제발 나는 미국인이라고 말 좀 해줘.")

 

유럽에서 미술 공부할 거 다 하고, 배운 거 잘 써먹은 사람이 한 얘기이다. 

 

<필자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작품인 James McNeill Whistler 초상화(William Merritt Chase, 1885): 캔버스에 유화

 

두 번째 인물은 조금 전에 사전트 이야기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 Whistler)(1834–1903)이다. 

아버지와 친척이 미국 최고의 군사학교인 웨스트포인트(West Point)에 연이 있는 덕분에 이런 아빠 찬스로 지독한 근시에 몸도 부실했지만, 1851년 이 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성적이나, 복장, 행실 무엇 하나 제대로인 게 없는 관심병사였던 휘슬러는 3년 만에 학교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결국 미술이 자신의 적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1855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다. 프랑스 여자 친구도 사귀고,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예술가의 삶을 즐기고, 파리의 카페 문화에 젖어 제대로 파리지엔의 삶을 살았다. 

 

이후, 1860년대 이르러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영국 런던에 정착한다. 그의 스튜디오가 템즈강(Thames)과 가까웠기 때문에 휘슬러는 템즈강을 주 배경으로 그의 녹턴(Nocturne)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물론 템즈강만 주제로 그렸던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그의 인상주의 화법을 잘 보여준다. 음악의 레가토(legato)와 같이 중단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붓질로 밤에 보이는 형체들을 뚜렷하지 않게 표현한 것이 마치 쇼팽의 녹턴과 같이 로맨틱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그는 이 그림들을 처음에는 "달빛"이라는 뜻의 "Moonlight"이라고 했었는데, 나중에 제목을 "녹턴(Nocturne)"이라고 바꾸고 매우 흡족해했다. 휘슬러는 그가 "녹턴"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공을 그의 중요한 작품 손님이자 쇼팽을 좋아했던 레데릭 레이랜드(Frederic Leyland)에게 돌렸다고 한다. 구체적인 형상이 이미지로 떠오르는 "달빛(Moonlight)"보다 "녹턴(Nocturne)"이 심적 이미지를 더 추상화하면서 그의 작품 의도와 더 잘 어울린다. 

<필자 사진> Harvard Fogg Museum 소장 Nocturne in Grey and Gold: Chelsea Snow (James McNeill Whistler 1876): 캔버스에 유화
<필자 사진> Harvard Fogg Museum 소장 Nocturne in Blue and Silver (James McNeill Whistler 1871-1872): 패널에 유화
<필자 사진> 보스턴 미술관(MFA Boston) 소장 Nocturne in Blue and Silver: The Lagoon, Venice (James McNeill Whistler, 1879-1880): 캔버스에 유화

 

휘슬러는 이렇게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살다가 1903년 69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삶을 산 그도 미국 국적을 포기한 적은 없었고, 결국 유럽에서 죽은 미국인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1844-1926)이다. 필라델피아에서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메리 카사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66년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난다. 그 당시 여성은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학교의 유명한 스승들과 개인교습을 받는다. 메리 카사트는 나중에 에드가 드가(Edgar Degas)와도 친분을 쌓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 무렵 프랑스 예술계는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나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같은 예술가들이 전통적 교습법에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사트는 이런 신조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적 방식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1870년 늦여름 미국으로 돌아온 카사트는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림을 그리는 딸이 못마땅했던 아버지는 딸에게 기본적인 생활비 외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료비 같은 별도의 지원은 하지 않았다. 카사트는 뉴욕의 갤러리에 그림 2점도 걸었지만, 괜찮았던 반응에도 불구하고 구매자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카사트는 그림을 포기해야 하는 고민도 했다. 유럽으로 돌아갈 가망이 보일 때까지는 붓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도 해보았다. 카사트는 절박한 마음에 시카고에도 가보았지만, 결국 이렇다 할 결실 없이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그림 몇 점만 잃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로마 가톨릭 주교의 눈에 들어 이탈리아 화가 코레지오(Correggio)의 그림 두 점을 모사해 달라고 의뢰하면서 돈도 미리 지급해 주었다. 메리 카사트는 이 돈으로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행경비와 숙소도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유럽, 아니 더 구체적으로 파리는 메리 카사트에게 그녀의 그림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절실한 곳이었다. 결국 카사트는 1926년 82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 인근에서 사망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죽을 때까지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고, 존 싱어 사전트나 제임스 맥닐 휘슬러와 같이 미국의 화가로 남았다. 

<필자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Girl in Red Hat with Dog" (Mary Cassatt, 1882-1883): 캔버스에 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