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팔아 직접 찾아간 미국의 인물, 건물, 그리고 사물 이야기

2. 혜성과 같이 나타나 혜성과 같이 사라진 인물: 마크 트웨인(Mark Twain)

ktiffany 2024. 12. 27. 13:05

"I came in with Halley's Comet in 1835. It is coming again next year, and I expect to go out with it. It will be the greatest disappointment of my life if I don't go out with Halley's Comet."

(나는 1835년 핼리 혜성과 같이 왔다. 그 혜성은 내년에 다시 올텐데 나는 그 혜성과 같이 갈 것으로 기대한다. 내가 핼리 혜성과 같이 가지 않는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그 보다 실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소설가로 알고 있는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핼리 혜성(Halley's Comet)이 지구에 가장 근접했던 해 중 하나인1835년 미주리주의 플로리다(Florida)에서 태어났다. 18살이 되면서 뉴욕과 필라델피아 신문사에서 글을 쓰면서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 18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증기선 운전사가 되었다. 그러나, 1861년 남북전쟁(the Civil War)으로 인해 강을 통한 교통이 막혀버리면서 그의 직업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직업을 통해 그의 평생 브랜드가 된 필명 Mark Twain을 얻었다. 사실 Mark Twain은 그의 필명(nom de plume, pen name)이고, 진짜 이름은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원래 Mark Twain은 배가 다닐 수 있는 최소 강의 깊이인 2 fathoms (12 피트)를 뜻하는데 Mark Twain은 여기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사진을 보고 한 눈에 반한 올리비아(Olivia)와 결혼하는데, 사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Olivia는 마크 트웨인의 구애보다 마크 트웨인을 전도하는데 더 힘을 썼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의 러브 레터에 성경말씀으로 답장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결국 Olivia와 결혼에 성공한 마크 트웨인은 코네티컷주의 하트포드(Hartford)에 정착하고, 집을 짖는다.
 
클레멘스 부부는 1873년 뉴욕의 건축가인 에드워드 턱커먼 포터(Edward Tuckerman Potter)에 집 디자인을 맡겼는데 사실 이 건축가는 집보다는 주로 교회를 많이 디자인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집 디자인을 처음 보면 좀 주택같지 않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집은 3층에 방 수만 25개이며, 내부 인테리어 또한 유명한 디자이너였던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와 같은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썼다. 루이스 티파니는 그 당시 백악관 실내 디자인을 의뢰받을 정도의  최고의 디자이너였으니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을지는 상상할만 하다.
결국 그 당시 건축비가 4만달러 이상 들어갔다고 하는데,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백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다. 단순히 인플레이션으로만 따져서 그 정도 가치이지만, 요즘 부동산 시세를 생각한다면 훨씬 더 많은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중에는 돈이 모자라서 적당히 싸게 마감한 흔적도 있다고 한다. 이 막대한 건축비는 Olivia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쉽게 말해 처가 찬스를 쓴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이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서 가이드 투어가 가능한데 안에 들어가보면 굉장히 화려하고, 섬세한 디테일까지 티파니의 손길이 느껴지는 디자인이 묻어난다. 
 
마크 트웨인은 이 집에서 17년을 살게 되는데 이 집은 마크 트웨인이 직업적 성공이나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애착을 가진 집이었다. 마크 트웨인이 얼마나 이 집을 애정했는지 그는 이 집에 마음과 영혼, 눈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To us, our house had a heart, and a soul, and eyes to see us with..."

실제로 마크 트웨인은 이 집에 머무는 동안 그의 인생 역작들을 탄생시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톰 소이어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 (1876) 이나 후속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4)이 이 시기에 쓰여진 소설들이다. 

<필자 사진>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의 마크트웨인 집: 현재는 박물관으로 가이드 투어를 예약할 수 있다.

 
사실 우리들은 대부분 마크 트웨인을 소설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사실 사업가이기도 했다. 다만 그의 사업욕에 비해 사업성적은 모두 좋지 못했고, 심지어 심각한 재정위기로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된다. 
우선, 그는  책도 쓰고, 출판도 해서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요량으로 1884년 Charles L. Webster and Company라는 출판사를 차리게 된다. 이 출판사를 통해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1885) and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의 회고록(1885)까지 한 해에 두 책이나 성공시키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 했지만, 이후 계속되는 실패로 결국 1894년 문을 닫는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은 발명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자신도 3건의 발명 특허를 내기도 했고, 과학자인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와도 오랫동안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개인적 기질로 인한 것인지, 정말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실수는 어의없는 발명품 투자로 발생한다. 마크 트웨인은 사람이 손으로 인쇄 문자를 배열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하는 자동 식자기(typesetting)에 매료되어 제임스 페이지(James  W. Paige)가 발명한 Paige Compositor에 몰빵하다 싶을 정도로 투자한다. 실제 투자금액이 그 당시 기준 300,000달러라고 하는데,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해도 대충 1천만달러가 넘는 금액이다. 게다가 그는 사실 본인 돈만 태운 것이 아니라, 와이프가 상속받은 돈까지 투자하는 리스크를 감행했다.
 
이 기계는 숙달된 사람이 한 시간에 1500자 정도 세팅할 수 있는데 비해 6배나 빨랐다고 하는데, 마크 트웨인은 이를 인쇄 기술의 혁명으로 인식한 것 같다. 이 기계는 무게만 2.5톤(약 5천 파운드)에 부품도 18,000개가 넘었다. 이렇게 부품이 많이 들어가는 기계이다 보니 고장이 워낙 잦았고, 인간보다 6배 빠른 장점은 수리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으로 다 잡아먹었다. 게다가 오트마 머젠탈러(Ottmar Mergenthaler)가 발명한 라이노타이프(Linotype )기계가 이론적으로는 조금 더 느리지만, 품질이 검증된 제품으로 인쇄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마크 트웨인의 투자는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었다. Paige는 실제 작동하는 Compositor를 단 2대 만들었는데, 이 중 코넬 대학교가 소유하고 있던 1대는 학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철 모으기 운동에 기증하고, 단 1대가 마크 트웨인 하우스 박물관에 남아 있다. 아마 2.5톤이나 되는 엄청난 무게로 봐서 인쇄보다는 전쟁에서 기여를 더 많이 했을 법도 하다. 

Paige Compositor: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 마크 트웨인 집 박물관(Mark Twain House & Museum) 소장

 
 현재 살아있는 유명인 중에는 자신이 갖고 있는 부동산, 빌딩마다 자기 이름으로 명명할 정도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만큼 본인 이름을 브랜드화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사실 도널드 트럼는 뉴욕 맨하탄 미드타운 5번가(5th Ave)에 있는 자신의 빌딩에 트럼프 타워(Trump Tower)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빌딩에 입점한 상점들까지 자신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지만, 자기 이름을 브랜드화한 것으로 치자면 아마 마크 트웨인이 선구자가 아닐까 싶다. 다만 마크 트웨인은 본인이 직접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마케팅 목적으로 마크 트웨인의 이름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지금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남의 이름을 허락도 없이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무단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대수롭게 여겨지던 시절은 아니었다. 마크 트웨인이 유명해지면서 여러 회사들이 앞다퉈 마크 트웨인 이름을 붙인 제품들을 내놓았는데, 심지어 밀가루 회사에서도 마크 트웨인 이름을 붙인 밀가루 상품이 나오기도 했다. 

<필자 사진> 뉴욕 맨하탄 5번가(5th Ave)에 있는 트럼프 타워(Trump Tower) 빌딩

 

<필자 사진> 도널드 트럼프는 본인 빌딩에 입점되어 있는 상점들도 본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Trump Store, Trump Cafe, Trump Grill, Trump Sweets

 

<필자 사진> 마크 트웨인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도용한 밀가루 제품 봉투(Mark Twain House & Museum)

 

<필자 사진> 마크 트웨인 이름이 들어간 다양한 다양한 제품들(Mark Twain House & Museum)

마크 트웨인은 사업과 투자 실패, 게다가 사치스러운 라이프 스타일로 인해 빚더미에 앉았고, 결국 1894년 파산신청을 해야 했다. 파산선언으로 그는 채무를 면했지만, 그는 돈을 갚기 위해 장기 해외 강연을 다닌다.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고, 그의 강연도 매우 성공적이어서 결국 그는 파산 선언으로 갚을 의무가 없는 돈도 다 갚았다. 그러나, 해외 순회 강연 중 미국 집에 머물던 둘째 딸 Susy Susi가 척수막염( spinal meningitis)으로 24살 젊은 나이에 죽게되는데 그는 결국 딸의 임종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가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자식의 죽음 소식을 먼 타국땅에서 전해 듣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
 

"I was born modest‚ but it didn't last."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그 가난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본인 스스로 가난한 출생이 오래 가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많은 돈도 벌어보고, 또 투자 실패로 바닥까지 가는 삶과 사랑하는 젊은 딸의 죽음도 지켜주지 못하기도 한 폭넓은 스펙트럼의 삶을 산 마크 트웨인은 본인이 예고한 대로 핼리 헤성이 근일점에 온 1910년 4월 20일 후 단 하루 뒤인 1910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