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지하철은 지저분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쥐도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뉴욕의 관광객이든 살고 있는 현지인이든 맨하탄에서 돌아다니는데 뉴욕 지하철만 한 것이 없다. 단지 맨하탄에서 차를 운전한다는 이유 하나로 살인적인 주차요금과 통행료, 그리고, 24년 1회 연기 끝에 결국 25년 1월 도입된 맨하탄 내 혼잡 통행료(Congestion Fee)까지 내야 하니 사실 맨하탄에서 운전을 주이동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얘기이다. 게다가 뉴욕의 지하철은 우리나라처럼 땅속을 깊게 파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선은 짧은 계단 하나, 두 개 정도면 바로 지하철 플랫폼으로 연결되어서 편리하기도 하다. 게다가 뉴욕 지하철은 24시간 운영된다.

그런데, 뉴욕 지하철을 타지 않더라도 맨하탄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하철 입구에 있는 흔한 풍경 중 하나가 둥근 램프이다. 보통 아래위가 다른 색깔로 반달처럼 나뉜 이 등의 정체는 무엇일까? 장식용 등이라고 하기에는 좀 멋스러움이나 디테일도 없다. 1904년 10월에 개통해 100년을 훌쩍 넘어버린 뉴욕 지하철의 역사에 비하자면 사실 이 등은 꽤 최근에 생긴 설치물이다. 좀 더 정확하게 시기를 특정하자면, 이 등은 1980년대 등장했다. 그러니, 지하철 개통의 역사보다는 훨씬 짧긴 하지만, 이 등조차도 40년이 넘은 물건인 것이다.
사실 이 등은 처음 설치되었을 때 분명한 용도와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것이다. 기본적으로 지하철 이용 승객들이 지하철역에 들어가지 않고도 지하철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상에 눈에 잘 띄게 세워진 것이다. 대충 짐작할 만하지만, 이 등의 정보는 색깔에 들어있다. 그러나, 100%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하철 이용객이든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든 이 등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쓸데없는 정보를 주겠다고 서있는 것이다. 존재감 없는 존재감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에 이 등은 세 가지 색깔 체계로 만들어졌다. 초록색, 노란색, 그리고, 빨간색이다. 그러나, 노란색은 곧 폐지되고 자취를 감췄다. 그럼 이런 색깔들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초록색 등은 지하철역에 24시간 운영하는 유인 매표소(토큰)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빨간색은 출구 전용으로 표를 팔지 않는 역이다. 그럼 굳이 이렇게 친절하게 지하철 역밖에 이런 표시를 해둔 뜻은 무엇일까?
80년대 뉴욕 지하철은 지금보다 훨씬 위험하고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 색깔 등을 설치하는 것은 지하철 이용객들이 지하철 역사에 진입하기 전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불필요한 범죄 가능성을 줄이고자 한 기특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94년 매트로카드(MetroCard)가 도입되면서, 메트로카드 자동판매기가 전역에 설치되고, 지하철역 턴스타일(Turnstile)도 한쪽 방면이 아닌 출입 양방향 모두 허용하는 디자인이 도입되면서 빨간색 등은 더욱 용도가 유명무실해졌다. 사실 요즘에는 버스/지하철 모두 신용카드로 이용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90년대 신물물이었던 매트로카드도 이제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게 되긴 했다. 매트로카드도 곧 사라질 위기이니 기회가 있다면 하나 기념으로 간직해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탄생한 지하철 둥근 색깔 램프는 본연의 역할을 잊은 채 지금은 뉴욕의 당연한 풍경처럼 자리 잡았고, 밤에도 뉴욕시를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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