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t peeve
동양의 마키아벨리에 비견되기도 하는 한비자 세난 편에 군주를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비유하기 위해 "역린(逆鱗)"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무릇 용이라는 동물은 유순해서 길들이면 탈 수도 있지만, 턱 밑에 난 거꾸로 난 비늘, 즉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한비자는 군주에게도 이런 역린이 있으니 군주를 설득하려는 자는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하니 감히 군주에게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신하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 우리가 사는 작금의 시대가 군주의 통치하에 있지는 않지만,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군주를 모시고 산다. 이들은 회사의 부장님이나 팀장님일 수도 있고, 시급제로 일하는 편의점 사장님일 수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왕의 씨를 갖고 태어나 왕이 되는 교육을 받은 임금에게는 단 하나의 역린만 있는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군주들은 "순린(順鱗)", 즉 바르게 난 비늘보다 "역린"을 찾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 만큼 윗 사람에게 자신의 솔직한 의견으로 설득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묵언의 예스맨이 되는 안전한 길을 택하게 된다.
역린이 두려움의 대상인 이유는 그 역린을 가진 용이나 용에 비유되는 군주가 가진 어어마한 힘 또는 권력때문이다. 또한 역린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잡아서 죽인다는 예외없는 철저한 원칙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붕어에게 역린이 있다한들, 또 그 역린을 건드린다한들 금붕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금붕어에게는 용이 가진 무한의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금방 먹이를 먹고 나서도 돌아서면 자기가 먹이를 먹었다는 사실도 까먹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런 금붕어에게 복수란 물 건너간 일이다. 아마 금붕어에게 역린이 있다면 그저 특이한 돌연변이 정도로 취급받을 일이다.
누구도 군주의 역린을 건드릭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저 그 역린이 보이지 않아 실수할 따름이다. 그래서 역린이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 된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 짜증이 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예측도 할 수 있고, 그러니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역린은 그렇지가 않다. 용의 몸에 있다는 81개의 비늘 중 딱 하나의 역린을 건드릴 확률은 낮지만, 건드렸을 때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
그러면 "역린"이 통할 만한 영어 표현이 있을까? 2014년 개봉한 한국 영화 "역린"의 영어 제목은 "The Fatal Encounter"(치명적인 만남?)였다. 굳이 "역린"을 영어로 옮기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한비자에 나오는 "용의 비늘"에 관한 우화를 영화 제목으로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감독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영화 제목에서 "역린"의 영어표현에 대해 힌트를 얻고자 하는 일은 물건너 갔다.
쉽게 생각해 "역린"이란 "임금의 짜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짜증은 영어로 "annoyance" 정도면 된다. 결국 "king's annoyance"가 "역린"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역린"처럼 멋있는 표현은 아니지만, 의미만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다면 그럭저럭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까 말할 것처럼 "역린"은 더울 때 나는 일반적인 짜증과 같은 것은 아니다. 용에게나 있는 변이같은 거꾸로 난 비늘 딱 하나처럼 매우 독특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처럼 사소한 것에 노여워하거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역린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우리도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저 친구 갑자기 왜 이래?"라고 할 정도로 사소해 보이는 일에 불쑥 화를 내는 경우를 본다. 이런 것이 "역린"에 가깝다. 그렇게 보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숨겨진 "역린"은 다 있다. 다만 역린을 건드렸을 때 생사여탈을 좌우할 만한 권력이나 힘이 없을 뿐이다. 최근 어느 정치인이 대통령이 검찰총장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언론에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역린"은 임금님의 노여움인데 대통령보다 서열도 한참 밑인 검찰총장의 역린"씩"이나 건드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역린"의 유래를 생각하면 일리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표현하면 그만큼 "역린"이라는 표현이 대중화되면서 그 유래를 떠나 용례가 넓어지면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친구들끼리도 "너 내 역린을 건드릴래?"라는 식으로 용도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역린"에 어울리는 영어 표현은 "pet peeve"라는 생각에 미친다. "peeve"는 "annoyance"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즉 "짜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 "pet"이 붙으면서 개인에게 독특한 "짜증"으로 의미가 한정된다. 어느 사람이 보기에 별 거 아닌 일에 유난 떨며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다면 이것이 "pet peeve"이다. "pet"은 뭔가 소중하고 개인화된 대상에게 붙는 단어다. 내가 키우는 반려동물(pet)이 나한테나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다. 영어로 "teacher's pet"은 학급에서 특정 선생님이 유난히 최애하는 학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역린"은 "king's pet peeve"이고 조금 더 일반화하면 그냥 "pet peeve"라고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용이 가진 "역린" 즉 거꾸로 난 비늘은 용이 애지중지하는 "pet" scale(비늘)이라고 할 수 있다.
"pet peeve"에 "역린"이 유래한 근사하고 멋진 신화나 우화가 들어 있지는 않지만, 의미적으로는 충분히 상통할 만 하다. 물론 그렇다고 "역린"이라는 영화에 "King's Pet Peeve"라고 영어 제목을 붙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장르가 코믹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관점을 바꿔서 그 동안 우리말에는 "pet peeve"를 "짜증" 외에 딱히 다르게 옮길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미 말한 것처럼 "pet peeve"는 일반적인 "짜증"과는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pet peeve"를 "역린"과 연결하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 "pet peeve" 용례
Let's start with my biggest pet peeve: hotels that charge for wifi. <The Canberra Times, 2019.11.13>
(먼저 나의 가장 큰 역린으로 시작하자. 그건 바로 와이파이에 돈을 물리는 호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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